지금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출애굽기 2:23~25)

양정국 0 1,533
출 2:23-25 지금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지금 대한민국과 한국교회가 고난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데 이때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한글성경에 “부르짖다”라는 단어가 적어도 250회 이상 나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부르짖다”라는 히브리어 단어가 무려 10개 이상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한 책입니다. 또는 인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본문은 구약 최대 구원사건인 출애굽이 어떤 동기에서 일어났는지 알려주고 있는데 출애굽이 오래 전 아브라함과 언약한 사실이지만(창 15:13-14), 여호와께서 착수하게 된 동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이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즉 언약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구원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당사자의 부르짖음이 있어야 여호와께서 구원에 착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일마다 때마다 계속 부르짖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도 부르짖어야 했고(출 14:10) 마라의 쓴 물 앞에서도 부르짖어야 했습니다.(출 15:25) 즉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과정이요, 신앙생활 하는 것은 부르짖음의 체질화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부르짖음과 응답이라는 구조를 제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에는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 여러 민족들이 승선을 하였습니다. 그 배가 큰 풍랑을 만났을 때 그들은 각각 자기 신에게 부르짖었습니다.(욘 1:5) 그러나 그 어떤 신도 요나가 탄 배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일을 일으킨 분이 여호와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 요나가 범인인 것이 드러났고,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풍랑이 멈추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습니다.(욘 1:15-16) 즉 요나에게 제비 뽑힌 것은 그가 범인인 것도 의미하지만, 여호와가 참 신이신 것이 뽑힌 것입니다.

  북 왕국 아합 왕은 바알 광신자입니다. 이에 엘리야가 갈멜산 대결을 제안했고, 그래서 갈멜산 제사 대결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신들의 싸움입니다. 누가 진짜 신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그런데 바알 선지자들이 하루 종일 큰 소리로 바알에게 부르짖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즉시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습니다. 여러분! 잡신에게 부르짖어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부르짖어도 도움이 안 됩니다.(시 146:3-4)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시 118:5)

2. 부르짖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자기가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죄인이 있고, 내가 왜 죄인이냐 우기는 죄인이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다 불쌍한 존재인데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가 왜 불쌍하냐 하면서 세상에 하찮은 것들로 위로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존재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하고, 자기 형편 처지를 있는 그대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 첫째는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있고, 둘째는 교만해서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 당시 남북 왕조는 언약의 백성이면서도 여호와를 몰랐고, 여호와를 모르니 그 고통 가운데서도 부르짖지 아니 하였습니다.(사 1:2-3) 달리 표현하면 여호와께 부르짖는 사람만이 자기를 아는 사람입니다. 다윗을 성군이라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시 131:1-2, 시 23편) 이렇게 다윗이 자기를 알고, 여호와 하나님을 아니 그는 일마다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시 34편, 61편, 삼하 22:7)

3. 그러므로 부르짖음은 믿음의 척도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당하여도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음은 믿음의 척도입니다. 부르짖음의 순도와 분량이 그 사람의 믿음의 순도와 믿음의 분량입니다. 예수께서 눅 18장에서 말씀하신 불의한 재판장과 한 과부 이야기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러분! 주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진정 여호와를 찾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부르짖으면 여호와께서 응답하시는데 믿음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가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번에 대한민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급속 감염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31번 확진자가 나오기 전까지는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31번부터 7천 명 이상이 나오기까지 이는 바이러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치 요나가 탄 배가 풍랑을 만날 때가 아닌데 풍랑을 만난 것같이, 이번 일에 여호와 하나님의 의도가 보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지금은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한 문제 해결자이시며, 구원자이십니다. 예배당 문은 열려 있으니 하루에 한 번씩 예배당에 와서 부르짖든지, 어려우면 집에서나 직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그리고 매일 저녁 9시 있는 그곳에서 전 교인이 하나님께 엎드려 부르짖읍시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데 이번 코로나19로 인해 피해 입고, 손해 보는 것보다 훨씬 값진 것을 얻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